나의 카빙 작품

노 무현 대통령님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흰밥에 게장 2009. 5. 25. 11:12


 

학벌타파... 혈연타파... 지역 장벽타파... 지금의 누구와는 다른 모습. 국민에게 고개를 숙일 줄 알았던그 누구보다 자국민을 존경했었던 당신... 수고하셨습니다. 하늘에선 편히 쉬세요.감사했습니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청와대에 올라온글중.. 에서 옛날에 모호텔 일식당에 근무했을 때 국회의원 시절에 오셨었죠.. 많은 정,재계인사들이 자주 식사를 하셨는데.. 주로 접대를 받으셨죠.. 전부 항상 최고급회나 고급양주들을 드시니까 그 날도 주방은 최고급 횟감을 준비했고 저도 그러려니 하고 " 무얼 드시겠습니까?" 그러니 "아가씨 죽 한 그릇만 주세여.." "네???" 기업대표가 " 아 왜 그럽니까.. 아가씨 젤 맛나고 비싼 걸로 줘"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었죠...." 아가씨 나는 얻어 먹는 건 너무 싫고 내 돈 주고 먹을라니까 호텔에서 죽 한 그릇 먹을 돈 밖에 없어.." 그러고 매번 오실 때 마다 죽 한 그릇 드시고 계산도 따로 하셨죠... ㅠ 전 믿어요..그리고 존경합니다~권보영씨글 (05.23 14:57)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 노 무 현. 2009년 5월 23일 서거.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주변 인척중에 많이 배운 사람도 물질이 많은 사람도 없었던.. 그래서,,,든든한 배경조차 없었던... 이 시대에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셨던 정치적 이단아로,,, 인권변호사로... 입지적인 인물이셨던 당신은 모든 짐을 껴안고 홀연히 떠나셨습니다. 어제 늦은 밤부터 내린 이슬비가 어쩌면 당신의 서거를 미리 예고하고 흘린 눈물이었던것을 오늘 아침에야 알았습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던가 봅니다.' 어느 누가 양심에 자유로 울 수가 있는지..?감히 묻고 싶습니다..' 온 국민을 슬픔과 비통으로 몰고 가신 당신의 유언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으로 울었습니다." 운명이다...화장해라""너무 슬퍼하지 마라"" 책을 읽을수도 글을 쓸수도 없다"" 건강이 안좋아 아무것도 할수가 없다"" 너무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미안해하지 마라,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을 고통이 너무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 가 없다""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세워달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조각이 아니겠는가"... 보잘것 없는 이 민초가 할말은(?) 많지만 이 나라의 최고 위정자의"애석하고 비통한 일" 이라는....가난한 서민들의 대명사 이셨던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드셨으면 사랑하는 국민들과 가족들을 남기고 험하고 그 먼 길을 떠나셨는지....당신의 서거를 가슴으로 애도드립니다. 어느날... 얼굴은 웃고 있지만...마음이 슬퍼보이는 한 사람이 TV에 비쳐더랍니다~~ 미소에 강직함 보였는데...펼칠수없음에 갑갑해 하는사람~!! 그 분의 마음이 보여 정치엔 아무것도 모르는 전 "노사모"에 가입했더랍니다. 어제는 갑잡스런 비보에아무것도 할수없을만큼, 손도 마음도 떨려 어느것도 잡히지 않아 힘들었구요~~!! 콩국수 먹은것이 목에걸렸는지 점심내내갑갑..." 노사모가아닌 그 어느 누구라도...가슴 아팠겠지요...? 그분의 짧은유언은... 천 페이지의 책장에 나온 말보다... 베스트셀러에 나온 유명문구보다... 절절함으로...애통함으로...감동으로... 다가온 가난한 대통령의 마음이었던것을... 사랑하는 이들을 희생으로... 지켜주려했던 그분의 행동에..잠시 예수님의 사랑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토요일 새벽... 노무현님께도... 노사모 홈 피에 글 올렸더랍니다~~올리고 2~3시간 지나 비보를 들었으니...^^ 평소에 새벽에 글쓰는 일 없는데 이런일 예견했을까요...? 마지막 편지가 되어 버렸네요~두어시간만 빨리올릴껄...하는 서움함과...슬픔이 밀려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난한 이 백성도 슬픈것을...모든일들이 평화로와 지기를.... ...믿겨지지않는 것은 저 만이 아니겠지요. 하늘도슬퍼...울려하는 이 시간에...뉴스보며...눈물훔치다 가슴 먹먹함으로...대통령님의 모습담아 기도하는 마음 으로 올려드립니다~"" 내가 생각하고,사랑하는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랫는데...어이하오리까..? 단장님 ... 언제나 마음의 건강함 오래 간직하소서 ~~!! 이런...사람이었는데...? 홈피에서 퍼온글 올려봅니다~~ (사람 사는 세상 / 노무현 / 2009-04-17) 강금원이라는 사람 강회장이 구속되기 전의 일이다. 내가 물어보았다. “ 강 회장은 리스트 없어요?” “내가 돈 준 사람은 다 백수들입니다. 나는 공무원이나 정치인에게는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 그 많은 돈을 왜 주었어요?” “사고치지 말라고 준 거지요. 그 사람들 대통령 주변에서 일하다가 놀고 있는데 먹고 살 것 없으면 사고치기 쉽잖아요. 사고치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고 도와준 거지요.”할 말이 없다. 부끄럽고 미안하다. 나의 수족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줄줄이 감옥에 들어갔다 나와서 백수가 되었는데, 나는 아무 대책도 세워 줄 수가 없었다. 옆에서 보기가 딱했든 모양이다. 강회장이 나서서 그 사람들을 도왔다. 그 동안 고맙다는 인사도 변변히 한 일도 없는데 다시 조사를 받고 있으니 참으로 미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데 강회장이 계속한다. “지난 5년 동안 저는 사업을 한 치도 늘리지 않았어요. 이것저것 해보자는 사람이야 오죽 많았겠어요? 그래도 그렇게 하면 내가 대통령님 주변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기 때문에 일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강 회장이 입버릇처럼 해오던 이야기다. “회사일은 괜찮겠어요?” “아무 일도 없어요. 지난 번에 들어갔다 나오고 나서 직원들에게 모든 일을 법대로 하라고 지시했어요. 수시로 지시했어요. 그리고 모든 일을 변호사와 회계사의 자문을 받아서 처리했어요. 그리고 세무조사도 다 받았어요."그래서 안심했는데 다시 덜컥 구속이 되어버렸다.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게 사업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어떻든 강 회장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다.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강 회장이 나를 찾아 온 것은 내가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였다. 모르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후원금은 얼마까지 낼 수 있지요?” 전화로 물었다. “1년에 5천만 원까지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실로 온 사람이 강 회장이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한테 눈꼽만큼도 신세질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첫 마디를 이렇게 사람 기죽이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눈치 안보고 생각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경계를 하지 않았다.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장수천 사업에 발이 빠져서 돈을 둘러대느라 정신이 없던 때였다. 자연 강 회장에게 자주 손을 벌렸다. 당시 안희정씨가 그 심부름을 하면서 타박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정치인이 정치나 하지 왜 사업을 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 구박의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직접 타박하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에 나는 2000년 부산 선거에서 떨어졌고, 2002년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에는 장수천 빚 때문에 파산 직전에 가 있었다. 강회장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대통령이 아니라 파산자가 되었을 것이다. 강 회장은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단 한 건의 이권도 청탁한 일이 없다. 아예 그럴만한 사업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퇴임이 다가오자 강 회장은 퇴임 후 사업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강회장의 생각에는 노무현이 중심에 있었고, 나의 생각에는 생태 마을이 중심에 있었다. 결국 생태마을 쪽을 먼저 하고 재단은 퇴임 후에 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그렇게 해서 주식회사 봉화가 생겼다. 이름이 무엇이든 우리가 생각한 것은 공익적인 사업이었다. 70억이라고 하니 참 크게 보인다. 그런데 강 회장의 구상은 그보다 더 크다. “미국의 클린턴 재단은 몇 억 달러나 모았잖아요. 우리는 그 10분의 1이라도 해야지요.” 이것이 강 회장의 배포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은 돈을 모으기가 어렵다. 꼭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강 회장 혼자서 부담을 해야 할 형편이다. 강 회장은 퇴임 후에 바로 재단을 설립하자고 주장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좀 천천히 하자고 했다. 강 회장 한사람에게만 의지하는 것이 미안하고 모양도 좋지 않으니 출연할 사람들을 좀 더 모아서 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퇴임 후 바로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각종 조사와 수사가 시작되고, 박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도 시작되니 아무 일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모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재단은 표류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가급적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사업하는 사람들은 오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사업을 안 하는 사람이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디 취직이라도 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봉하에 오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런 봉하에 강 회장은 매주 하루 씩 다녀갔다. 그런 강회장이 구속이 되었다. 아는 사람들은 그의 건강을 걱정한다. 제발 제때에 늦지 않게 치료를 받고 건강하게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면목 없는 사람 노무현 곁에있는 사람을..지켜주지못함에 가슴아파하는사람~~ 그런 따뜻한 가슴을 가진분이 가셨으니...슬픔으로 다가옵니다^^ +++ 사랑하는 사람의 아침은 언제나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시작된다 +++ ">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곡.. 마이클 호페의 (링컨의 애가)는 1864년 남북전쟁 당시 5명의 아들을 전장에서 잃고 실의에 빠진 한 어머니에게 아브라함 링컨이 보낸 친서의 편지를 보고 감동 받아 작곡한 피아노 곡이랍니다^^ 링컨대통령의 편지내용입니다~~ ♧지난 15일에 아드님께서 빅스버그에서 전사하였다는 비통한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원통하고 애통하시겠습니까! 아드님께서는 자랑스러운 아메리카합중국 군인으로서 헌법을 수호하고 선조 대대로 이어져온 민주공화국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성스러운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 편지가 무슨 위로가 될지모르겠으나 아드님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땅에 어둠을 드리우는 무서운 억압과 독재,폭력,가난에 맞서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위로의 말씀드리며 귀하의 가정에 행복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864년 11월 20일,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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